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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og

눈꽃여행

2001년 겨울.

수능이 끝났고, 성적표가 나왔다.

 

지난 1년간 40명 중에 몇 등, 400명 중에 몇 등이니 하는 숫자에 일희일비했었던 나는

수십만 명 중에 몇 등이라는 가늠하기도 어려운 숫자 앞에 덩그러니 놓였다.

나는 그저 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수십만 개의 점 중 하나…

 

 

그제야 작은 교실에 앉아 3년을 같이 보낸 이들이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동지였다는 사실을.

경쟁을 해야 했다면 그 대상은 나 자신과 시험 문제 혹은 시험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덩그러니 남은 무기력함 속에 시간이 흘러갔다.

딱히 간절히 열망하는 목표도 없었건만. 그땐 왜 그렇게 힘이 빠져 있었을까?

그렇게 2001년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눈꽃이 보고 싶다"

스스로 움직여 갈 마음조차 없으면서 무심코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태백산 눈꽃 축제에 가보자고 하셨고 그렇게 온 가족이 집을 나섰다.


(태백산에 가기까지의 여정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태백산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새하얀 산의 풍경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눈이 많은데 눈꽃은 없었다.

무릎이 안 좋으신 어머니께서 주차장 근처 광장에 남으시고 그런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었던 동생이 같이 남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와 산을 올랐다. 

온몸이 땀에 젖도록 열심히 올랐다.

경치를 구경할 새도 없이 그냥 열심히 오르고 올랐다.

그리고 3시간이 조금 못되어 정상에 도착했다.


거기에 눈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탁 트인 정상의 경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세상은 넓구나...'

 

산꼭대기에 서서 본 세상은 넓었다. 

이곳 정상에서도 나는 작은 점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속이 탁 트였다.


나의 작고 보잘것없음을 상황으로 느낄 때는 설명되지 않던 것들이 

산 정상의 풍경에서는 한눈에 표현되고 설명되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나니 편하게 인정하고 흘려보낼 수 있었다. 

나의 성적도 한 점에 불과했지만, 수능도 넓은 세상과 내 인생에서 한 점에 불과했다.

 

내려오는 길에 흠뻑 젖어버린 아버지의 오리털 잠바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강인할 것만 같으셨던 아버지께선 중간 중간 숨차 하셨다.

지난 고3 시절처럼 급하게 올라가기만 하는 젊은 아들의 걸음에 맞추시는 것이 버거우셨던 것 같다.

광장에 도착하니 어머니와 동생은 추위 속에서 시간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5시간 동안의 기다림은 얼마나 지루했을까..

 

 

세상은 넓었다.

그리고 "눈 꽃을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함께 산으로 가 주는 가족이 있었다.

눈꽃이 없어도 괜찮았다.

한 점에 불과해도 괜찮았다.

그래서 괜찮았다.

 

'괜찮아...'

 

지금도 높은 곳에 서서 탁 트인 풍경을 볼 때면 그날이 기억난다.

내가 작은 점에 불과해도 괜찮았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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